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삿 6:22-24, 개역한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는 말씀은(호 4:6) 하나님이 이름을 잘 모르면 망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호와 샬롬이란 완전함, 건강, 복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관계, 즉 완전한 존재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과 복지와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이 샬롬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샬롬이란 어떤 경우에서나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우리 모든 삶의 외적 내적 영적인 문제까지 책임져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계시할 때는 항상 우리의 삶에 위기가 왔을 때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위기를 당할 때 그를 지켜주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나타나, 믿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타나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시는데 이 사건을 통하여 기드온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삿 2:1-3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죄와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에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여 주었지만 한 번도 너희들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고 오직 세상에서 구별되게 살 것만 요구했는데 왜 이것을 지키지 않음으로 너희들이 원수들로부터 이길 힘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신이 너희들의 올무가 되었느냐고 책망합니다.
즉 너희들이 악을 거부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았다면 나의 영과 능력을 보내어 너희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전부 소멸시키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우리의 문제는 주님은 죄의 위험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수없이 경고하시지만 우리들이 듣지 않기 때문에 아픔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경고의 말씀을 하실 때, 내 양심이 가책을 느끼면 반드시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보김'이란 장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경고하고 말씀하시면 진심으로 슬퍼하며 문제점을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뉘우침이 얼마가지 않고 다시 우상숭배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 흘리며 회개는 하는데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상은 우상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기억하십시오. 죄가 드러나고 운다고 해서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눈물과 함께 슬픔과 아픔과 가난과 어려움을 주는 일체의 드러난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죄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겉으로는 회개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말 2:1-3).
왜 여호와 샬롬이 임하지 못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죄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사탄의 논리에 어리석게 걸려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죄에 정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샬롬.
사사기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즉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죄에 대하여는 핑계하고 변명하며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죄를 깊이 깨닫고 돌아서는 자가 없습니다. 죄를 지적하면 기분 나빠하면서도 죄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우리도 망하는 길입니다.
죄에 대한 무관심은 죄의 악함이 우리 삶과 가정, 자녀들에게 침범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면 죄의 매체들이 우리에게 젖어들어도 그냥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하면 자신이 죄에 감염되었는지, 죄가 어떻게 내게 들어왔는지도 잘 모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있는 자리에서도 가만히 듣고만 있습니다.
결국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하면 서서히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내가 끊지 못하고 있는 죄가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조차 모릅니다.
하나님은 수시로 예언자들을 보내어 양심의 가책을 찔러줍니다. 양심의 가책이란 내 안에 있는 악의 모양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끊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죄를 남겨두면(마라에 쓴 물이나, 내가 건너지 못한 요단강) 정욕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는 100% 다른 길로 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죄를 지적하고 영적 경고를 주어도 반응이 없고, 그 말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적에게 수치를 당하고 개인과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삿 6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해마다 수확할 때가 되면 미디안 족속들로부터 침략을 당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농사를 수확하는, 바로 그때 공격하여 모든 것을 쓸어 가버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수확할 때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왜 막아주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이스라엘을 가난하게 하고, 수확의 결과가 없어지고, 가진 것을 빼앗겨 그 삶이 수치스럽게 되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 백성들을 도와주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사는데도 왜 두려움과 빈곤 속에서 살아갈까요. 백성들은 수확 때가 되면 뺏기지 않으려고 동굴 속에서, 혹은 집안에 숨어서 타작을 합니다.
물론 모든 저주와 실패, 아픔이 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시 34:19). 그러나 의인에게는 고난이 있어도 주의 때가 되면 반드시 해와 같이 빛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삿 6) 우상숭배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바알 제단에 빠져듭니다. 미디안 습격이 계속되어도 기드온 아버지 요아스는 바알 제단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바알을 버리지 못할까요. 바알을 섬기는 미디안 족이 자기들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들을 잘 지켜주지도 않고 미디안의 바알은 미디안을 강하게 하니 바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문제를 정확하게 하셔야 끝까지 배도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습니다.
왜 예배드려도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가 없으며 세상이 우리보다 강할까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다른 어떤 신보다 강하며 창조자요, 정복자이신데 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샬롬.
2023.01.17 - [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 샬롬 하나님 (삿 6:22-24)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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